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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해금이란 새로운 자아의 탄생. 무한대의 생명력, 호온도(H∞NDO)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필름 사진을 촬영(photograph)하고 인화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상을 살아가며 자신만의 고유한 잠상(latent image)을 축적한 아티스트는 이를 음과 박이라는 현상액(developer)에 담가 실상으로 떠올리고, 이는 여러 번의 교반 작업을 거쳐 하나의 노래로 인화(print)된다. 이 일련의 과정 가운데 세밀한 변수들에 의해 각기 다른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 OPCD는 저마다의 변수를 지닌 아티스트들을 포토그래퍼로 빗대어 본다. 이들은 어째서 이토록 수고로운 작업에 뛰어들었을까. 이들은 어떤 변수를 따라 어떤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Why Do We Make Music?>은 그 렌즈 너머를 들여다보려 한다.








‘호온도(H∞NDO)’라는 이름에는 해금 연주자 유호정의 끊임없는 음악적 이탈과 유랑에서 빚어진 무한대의 생명력이 담겨 있다. 전통 음악은 물론, 재즈, 락, 힙합, 엠비언트 등 다양한 장르 음악, 그룹 ‘매듭달’ 활동을 비롯한 크로스오버 작업, 그리고 디제잉에 이르기까지. 양손에 해금을 꼭 붙들고 시대와 분야를 종횡무진해온 그 경로에는 ‘호온도(H∞NDO)’의 열띤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음악의 방방곡곡을 유랑한 끝에 그의 발길이 닿은 행선지는 어떠한 장르가 아닌 해금 그 자체다. ‘호산조’는 7월 텀블벅 펀딩을 통해 출간한 단편소설 <이구와 도화> 와 이어지는, 전통 악기 해금의 생존법에 대한 그의 고민이 담긴 곡이다. 해금의 팔음(八音: 쇠, 돌, 실, 대나무, 표주박, 흙, 가죽, 나무)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만들어낸 이 “소음해금”은 전통의 뜨거운 새 생명에 대한 탐사기다.







Why : Why I started Music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나?



음악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너무 어렸어서 스스로 기억하고 판단하기에 좀 어려운데, 음악 하기 전후로 달라진 부분은 딱히 없는 것 같다. 다만 정말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었다. 메달도 여러 번 땄지만, 선수 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있었고 결국 하기 싫다고 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5~6학년 때 즈음이었을 거다.



언제, 어떻게, 왜 음악을 하게 되었나?



국악 학원 전단지 속 그림을 보고 이 8자처럼 생긴 거 배우고 싶다 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장구였고. 운동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푼 셈이었다. 나중에 학원 대표님의 권유로 국립국악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타악기 전공이 없어서 장구 다음으로 제일 호기심이 생겼던 해금을 택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국악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뒤의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최근 진행했던 단편소설과 해금 전자음악을 결합한 프로젝트 <이구와 도화>의 소개글에서 "10대, 특수한 환경 속에서 예술을 배우며 경쟁했고, 그 당시 친구들과 함께 가는 길에서 이탈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탈의 첫 시작은 재즈라는 문화였습니다." 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 과정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



계속 대회에 나가고 떨어지면 바로 다음 대회를 준비해서 무조건 1등을 향해 가는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어린 나이부터 주변인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기보다 당장 내 앞 사람을 이겨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학교라는 공간은 문제가 없다. 교육 제도가 문제였다. 학생이 질문이 생겼을 때 그 이유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고 무작정 옳고 그름만 알려주는 것에 싫증을 느꼈다. 반항심이 쌓이고 있던 중 이탈의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생겼다. 학교 과제 때문에 강은일 연주자의 <해금 랩소디> 공연을 보게 되었다. 여러 양악기와 국악기인 해금이 함께하는 공연이었는데, 무대에 선 해금 연주자를 보고 ‘나는 저 사람한테 음악을 배워야겠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특히 해금 연주자와 기타리스트가 번갈아가며 솔로잉을 하는 순간, 누구보다 더 잘났다고 각자 실력을 뽐내는 게 아니라 정말 함께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공연장에서 나갈 때는 팜플렛을 세네 장씩 움켜쥐고 달려나갔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공연은 재즈라는 장르를 품고 있었고, 그 사람들의 프로필을 보니 공통적으로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출신이더라. 그래서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모했지만 그 때는 그게 음악을 하며 행복해 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느꼈던 거다. 그렇게 스스로 몰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가게 된 것이 일전에 <라이프타임> 인터뷰에서 롤모델로 꼽으신 바 있는, 해금 연주자로는 최초로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진학하신 윤주희 님이었다고 들었다.



나의 입시 선생님이셨다. 워낙 선생님에 대한 갈망이 컸다. 소속된 환경에서 경험한 부조리함은 나에게 허탈감을 주었고, 그러니 음악이 될 리도 없었다. 당시 전통계 스승님의 도움으로 강은일 님의 제자인 윤주희 님을 뵙게 되었다. 몇 달간 연락을 드렸고 찾아가기도 했다. 어느 날 우유 한 잔을 내어주시면서 재차 나의 각오를 물으시더라. 진짜 가고 싶으냐고. 왜 가고 싶은 거냐고.



그래서 뭐라고 답했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를 이미 겪어보셨기에 하신 질문이었다. 낯선 곳에 접근해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같다고, 여태껏 수동적으로 음악을 마주했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고 싶다고, 스스로 책임지고 싶은 도전을 원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나와서 어떻게 다른 음악 방향으로 가느냐는 선입견이나 뒤에서 새는 말들이 들려오는 게 불편했고, 도전하는 시기에 쓸데없는 감정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고 느껴서 몰래 입시를 준비했다.



원하던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입학한 이후의 경험은 어땠나.



그때는 열정이 과하기도 했고 여유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특수 악기로 분류되다 보니 아무래도 음악적 소외감이 있었다. 없었다고 하면 정말 거짓말일 것이다. 일단 내가 다니던 학과는 기존 실용음악과와 다르게 모든 악기가 공통으로 재즈에서 시작한다. 입시 자체가 나열된 코드에 기반해서 혹은 작곡을 해서 즉흥 연주를 보여줘야 한다. 양악기와 다르게 나는 코드부터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넘어야 할 단계들이 많았다. 수업과 공연에 참여하면서 좋은 피드백도 많았지만 그만큼 공부해야 할 점도 많았다. 더 파고들면 근본 없는 무시까지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성장시켰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알다시피 학교는 작은 사회가 아닌가. 이미 10대 때 좁고 높은 문의 공동체를 경험했기 때문에 소외감 자체도 즐겼다. 생각의 방향만 바꾸면 되니까. 소위 말하는 ‘정치질’ 없이. 내 것을 만들어서. 본인이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졸업 이후에는 작년까지 세종국악관현악단에 있다가 올해 프리 선언을 했고 들었다.



한 3년 정도 있었다. 관현악의 이해도가 깊어질 즈음에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여러 생각과 새로운 계획이 늘어나면서 더는 관현악단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은 입시 레슨 등 학생들과 경험을 나누며 새로운 활동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리랜서는 장단점이 극명하다. 단점만 생각하면 끝이 없기에 모든 일에 건강하게 고민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우고 있다. 현재의 나로서는 만족도가 높다.



국악계의 교육제도에 느낀 반감이 컸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시스템 속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나름대로 세운 교육 방침이 있을까.



일단 대학에 가기만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맨날 깨부숴준다. 예시를 들어가면서. (웃음) 대학이라는 것이 자기 가치보다 우선시되면 인생이 좀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내 주변만 봐도 그랬고, 나 또한 경험해봤기에. 하나의 퀘스트라고 보면 오히려 좋다. 우리나라 교육 특성을 생각해보면 “말은 쉽지”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물음표 없이 끄덕이기만 한다면 본인만 손해인 셈이다. 대학이라는 퀘스트에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방안을 끊임없이 찾고 긍정적으로 시도한다면 그 결과는 분명 어떠한 퀘스트보다 더 많은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는 인생이 그저 대학 하나로 판단되는 시대가 아니므로 본인이 어떠한 잠재력과 가치를 가졌는지 파악하고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제자들에게 매번 하는 말이다.

또 한 가지는 본인 의지가 필요하다. 개인에게 자유로움이 주어졌을 때 본인이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그대로 나타나는 게 현실이다. 선생이라는 자격으로 원치 않는 친구들의 손에 억지로 무언가를 쥐여줄 필요가 없다.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느끼며 더욱 열심히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고, 그러한 시간이 오히려 배움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것을 안다.

아, 그리고 레슨하기 전에는 꼭 심리 테스트를 한다. 자문자답 식으로 스스로를 파악해 보자는 취지에서. 생각보다 많은 친구가 성심성의껏 답하고 그런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더라. 더불어 아이들과 작은 것부터 마음을 나누니 더 친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다양한 프로젝트로 해금을 들고 세계 곳곳을 누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있을까?



뉴욕에서 동료와 함께 한국 문화를 알리는 교육/공연에 참여하던 중 제안을 받아 초등학교 저학년 연령대까지의 어린 다문화 학생들이 모여 있는 보스턴의 한 예술학교로 긴 시차를 타고 갔다 온 적이 있다. 우리가 진행했던 시간에는 동양인이 2명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출입구에서 인사를 하던 중 동양인 친구 1명이 “한국에서 언니가 유명한 사람이면 우리 엄마한테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세요”라고 하더라. 나에겐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기억이 되어버렸다.



예명 ‘호온도(H∞NDO)’는 언제, 어떻게 짓게 되었나?



친구와 개인 작업에 열을 가하던 중 짓게 되었다. 작업 중 나의 몰입도가 어마어마하고 스스로 꽤나 주체적일 수 있음을 느꼈다. 여러 작업에 나를 유호정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적어두었지만, 이 작업에는 그에 맞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작업할 때마다 빈 종이에 다시 그리는 듯한 느낌이 들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데이빗 보위가 매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음악을 만들었다고 했던 것처럼. 그래서 ‘유호정 온도’를 줄여서 ‘호온도’라고 했다. 내가 만든 음악마다, 상황마다 달랐던 내 생각들, 그때의 ‘유호정 온도’가 담겨있기 때문에 표기할 때 무한대 기호를 썼다. 그리고 영원하기도 싶고 해서.







We : Latent Music inside Us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당신은 거기에 동의하는가?



긍정적인 강한 사람. 그리고 진짜 재밌는 사람. 어느 정도 동의한다. (웃음) 나도 내가 재밌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친한 사람들하고 있을 때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각종 취향과 영감의 조각들이 엿보였다. 당신의 취향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은?



미셸 공드리, 아이 야자와, 덴마크 민트 라떼, 믹스 매치, 제프리 캠벨, 미드나잇 가스펠, 게임 ‘하이힐!’

뭔가 설명할 수 없어도 주체가, 주장이 뚜렷한 것들을 좋아한다. 시각적인 것에 특히 취향이 확고하다. 예를 들면 미셸 공드리.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앞으로도 더 관찰하고, 내 마음대로 풀어낼 거야- 근데 너희도 너희 마음대로 생각해-’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그게 너무 좋다. 옛날엔 아이 야자와의 <내 남자친구 이야기>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주인공을 거의 뮤즈 삼아서 그와 똑같이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상상력이 강해서 2D와 현실 세계의 구분이 꽤 어려웠던 시기였다.







나의 영감의 원천은?



정말 사소한 일상의 누적. 영감을 무작정 만드려고 일부러 뭔가를 시도했던 적은 없다.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이, 사람들을 만나며 이루는 정서와 이야기들이 모두 누적되어 어느 순간 터진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진행 속도가 느려서 어려웠던 적은 없다. 설령 어렵다 해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많고 거기서 오는 불안함은 한 편에 항상 존재하겠지만, 너무 생각했다가는 영감을 떠나 내가 일궈 온 길이 순식간에 0이 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믿고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모든 순간들이 영감으로 쌓이고 있을 것이다.



음악 외에 관심사가 있다면?



요즘엔 다큐멘터리에 빠져있다.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 경쟁에서 전쟁으로>,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 추천한다.



이전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문구를 다이어리에 정리하는 것이 취미라고 언급한 바 있다. 최근 다이어리에 적은 문구는?



“삶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그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긴 여행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정함과 생명력에 기대어; 지리산 편지, 최은주)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에게는 사람이 제일 소중하다. 나를 둘러싼, 마주했던 모든 사람들. 매번 그리고 일일이 표현하진 못했어도 주변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가족. 미워도 사랑한다는 말이 최적화된 그룹. 또 내 둘도 없는 친구, 다롱이와 쿠키가 있다. 올해 벌써 7주기인데 시간 너무 빠르다.



내가 아끼는 물건은?



책, CD, DVD… 너무 많은데, 최근에 추가된 것은 <이구와 도화> 책과 아빠가 만들어주신 온도계다. 아빠가 잔재주가 많으시고 옛날엔 발명왕이 꿈이셨다고 한다. <이구와 도화>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집에 갔는데 “야 이거 해금에 넣고 다녀라” 하면서 주시더라. 내 활동명이 ‘호온도’였으니까 온도계를 만들어줬나 싶은데, 내 착각일까 봐 따로 여쭤보진 않았다 (웃음)






Make : Making Development




평소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즐겨듣고, 어떤 루트를 통해 음악을 찾아 듣는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즐겨듣는 편이다. 또 이동할 때마다 듣는 스타일도 나름 다른 것 같다. 사운드클라우드나 밴드캠프로 많이 찾아 듣고, 라이브를 보고 싶을 때는 유튜브를 켠다. 좋아요 눌러놓고 질릴 때까지 듣고 보는 편이다.



좋아하는 뮤지션은?



피셔맨, 라드 뮤지엄, 이상은, 비욘세, FKJ, 시규어 로스, 본 이베어, 톰 미쉬, 에디 히긴스 트리오, 로버트 글래스퍼 익스페리먼트, 하이에이터스 카이요테, 에스페란자 스폴딩, 데이빗 보위, 뷔욕, 아르카… 어떡하지 너무 많다.







최근 들었던 음악 중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노래/앨범 3가지



하이에이터스 카이요테 [Mood Valiant], ATLiens [The Montauk Project], 마커스 J. 뷸러 ‘Viral Counterpoint of the Coronavirus Spike Protein’



올-타임-베스트 노래/앨범 3가지



3개 넘게 뽑아도 되나? 비욘세 [Homecoming: The Live Album], 하이에이터스 카이요테 [Choose Your Weapon], 카니예 웨스트 [Sunday Service], 에리카 바두 [What You Can Use My Phone].



최근 즐겨 보는 음악 콘텐츠



Cercle, NPR, Knobs, Jazz Night in America.







평소 선호하는 음악 작업 환경은?



환경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몰입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더 바뀌는 듯한데, 나에게는 빛이 중요하다. 어두운 곳에서의 작은 조명 하나가 나의 집중력을 높여준다. 다만, 시력 저하 조심하자. 올해부터는 루테인 챙겨 먹고 있다.



연주를 하거나 곡을 만들 때 항상 이야기를 먼저 떠올린다고 한 바 있다. 과거의 작업물들을 예시로 그 과정에 대해 보다 더 설명을 듣고 싶다.



연주곡은 특히 전체적인 틀을 짜려면 항상 일종의 시놉시스와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억지로 만들어냈던 적은 없고 ‘그냥 생각해 볼까?’ 하면 탁 나오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심해°C’ 라는 연주곡은 세월호 사건 이후로 만들게 된 곡인데, 한 아이가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를 여행하며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Anna’라는 곡은 한 사람을 위해 만들었던 곡이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던 소꿉친구가 타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안나의 아버지는 한국에 남은 안나의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서도 삼일장을 치뤘다. 안나의 동생과 밤을 지새우며 나눈 대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언니는 음악을 해서 좋겠다”고, “음악으로 위로를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해주더라. 안나가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다.







Music : Printing out Music




발매 싱글 ‘호산조’는 텀블벅 후원을 통해 출간한 단편소설 <이구와 도화>에서 이어진다. 단편소설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터무니없이 언젠가 한 번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던 게 전부다. 책이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 너무 가까운 소재이기도 했다. 내 곁에는 항상 재미난 책들이 많았고, 읽으면서 꽂히는 단어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싶을 때 작업 노트 같은 곳에 적어두고는 했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택했던 것 같다. 음악을 만들 때 감정이나 상황을 배제하기 어려워하는 편이기에 음악에 나의 이야기를 넣는 것은 내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의 이야기가 없다면 음악도 완성되지 않는다. 할 얘기가 많이 누적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소설을 겁 없이 시도했던 것 같다.



<이구와 도화>에서 '호산조'로 이어지는 프로젝트에는 10명의 여성 프리랜서 아티스트들도 함께했다. 이들을 어떻게 불러모으게 되었나.



맨 처음에는 공연을 기획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공연을 만들 생각을 하니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우선 무대에 섰을 때 필수적인 것들을 헤아려보았고, 그 분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노력하는, 강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했다. 이전에 몇 번 마주치며 일을 했던 사람들을 물색하고, 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분야의 사람들, 이를테면 꽃과 관련된 작업물을 한 사람들을 검색하며 나와 결이 맞을 것 같은 사람을 밤낮으로 찾았다. 그렇게 올해 2월부터 4월까지는 연락만 계속 돌렸다. 매일 작가 분들의 작업실에 찾아가 PPT 발표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 10명 모였고, 10명 중 8명은 이번 프로젝트로 처음 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5월부터 7월까지는 <이구와 도화>의 이야기를 홍보하는 영상을 준비했다. 인터넷으로 쉽게 연락이 되는 시대라 쉬워보일 수도 있지만, 직접 만나 거절당하기 전까진 모를 거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뛰어다녀야 하는지.







결국 텀블벅 펀딩을 오픈하고 하루 만에 펀딩 목표액을 넘겼다.



정말 놀랐다. 처음 4분 동안 달성률이 0%라서 ‘아 헛살았다’ 생각하고 덮어두었는데, 퇴근하는 길에 같이 작업한 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축하드려요”라고. 펀딩이 끝난 후에는 10명의 동료들에게 편지와 작은 선물을 전달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나에겐 정말 큰 선물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이번 글과 해금 프로젝트는 개인적으로 내 능력을 스스로 평가해 보는 도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료들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구와 도화>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간 공동 창작물이기 때문에 펀딩 성공 후 함께 기쁨을 나눴다. 물론 감사의 정산도 놓치지 않고 해드렸다.



크로스오버 그룹 ‘매듭달’을 비롯한 기존 작업은 대개 흔히 떠올리는 '크로스오버' 스타일에 보다 가까웠다면, 해금을 구성하는 팔음(八音: 쇠, 돌, 실, 대나무, 표주박, 흙, 가죽, 나무) 소리를 각각 녹음하여 만들어진 곡 ‘호산조’와 주인공 이구가 쓰레기장에서 팔음의 재료들을 하나씩 모아가는 <이구와 도화>에서는 호온도만의 방식으로 전통을 해체하고 재조립해가는 여정이 느껴졌다. 이는 클럽 신도시의 DJ 워크샵에서 선보였던 해금 디제잉 퍼포먼스의 방향성과도 맞닿아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음악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10대 시절 가운데서도 항상 내 정체성을 궁금해했고,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그래서 여러 팀 활동을 했지만, 팀 활동 안에서도 새로움에 대한 갈증은 계속되었다. 여러 공연을 다니고, 보고, 듣기도 하면서 내가 무슨 소리를 좋아하는지 늘 찾아다녔다.

베를린에 갔을 때 타투이스트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너 이런 음악 좋아할 거 같은데?” 하며 자기가 좋아한다는 LP를 틀어줬다. 글리치(glitchy)한 소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악이었다. 그 음악과 그 음악을 이루고 있는 소리들에 크게 반응했다. ‘이 소리도 음악이구나. 생각해 보니 그렇네’ 싶더라. 옛날에 재즈를 시작하기 전에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당장 배워야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무지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배우려면 어떠한 단어 한 조각이라도 알아야 할 텐데, 내 머릿속에는 그 턴테이블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어이없지만 나는 그 소음을 알려면 먼저 디제잉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음) 어찌됐건 공부하는 와중에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소리는 50~80년대 전자음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전자음악의 큰 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곧장 해금과 연결시켰다.







양악기와 다르게 국악기는 여전히 원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악기다. (물론 요즘 전자 해금이나 여러 부가적인 요소들이 나오는 추세이지만, 그만큼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또한 원시적이다. 사람의 노동력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과거 전자음악의 원리가 많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서 이론적으로 비슷하다고 느낀 나 자신에게 정말 그럴싸한 이유가 더 필요했고, 그래서 시도했다. 그리고 약간의 오기도 있었다. ‘그냥 해보지 뭐’ 하는 그런 고집.



작업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사운드 변조 위주의 곡이면서도 해금의 본래 소리 또한 녹여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해금의 재료들을 6분 동안 쌓아올리는 과정음악을 만드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해금의 원래 소리를 숨기려고 했다. 그런데 해금의 새로운 시도를 알리려는 입장에서 너무 새롭기만 하면 당최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적당한 지점을 찾느라 애썼다.

그리고 전처럼 여러 악기를 이용해서 음악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보니 돌이나 모래 같은 물질의 소리를 녹음하는 과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악기가 아닌 재료들의 소리를 어떻게 녹음할까에 대한 고민과 녹음된 소리를 어떻게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신경 썼다.



앨범 아트워크도 굉장히 기이하고 독특하다.



‘오세애’ 작가님께 책과 음원을 드리면서 딱 두 가지를 말씀드렸다. 하나는 작가님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것을 제안했고, 또 하나는 해금이 사람이었으면, 주인공으로써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작가님 또한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다며 흔쾌히 받아주셨다. 우리는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각도로 해금 사진을 찍었고, 그 결과물들이 모두 합쳐져 하나의 이미지를 완성해냈다. 어떠한 것을 보았을 때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면, 분명 창작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바탕에 겹겹이 쌓여 마음에 심어지는 것일 테다. 그것이 영감이 될지도 모른다.







이번 작업의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가 “생명력”이다. 호온도가 생각하는 “생명력”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계속 찾아야 한다. 만약 좋아하는 게 뭔지 이미 안다면, 그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또 탐험하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생명력을 계속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오늘 힘을 내서 내일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가 될 수도 있으니까.



발매 싱글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나에게도 생소한 이 과정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재미와 의미가 공존해서다. 해금은 우리나라 악기 중 유일하게 8가지 재료를 쌓아 만든 악기이며, 그 팔음(八音)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고민했다. 오랜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해금의 또 다른 미래 생존법일지도 모른다.



발매될 싱글 이외에 현재 준비 중인 것이 있다면?



또 다른 곡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구와 도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Why Do We Make Music?




지금 당신은 왜 음악을 하고 있는가?



음악을 잃은 삶은 얼마나 지루할지 알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이루고픈 목표가 있다면?



“음원 사이트에 장르마다 ‘해금’을 연주한 내 음악이 발매되어 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당시 어떤 심리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린 마음에 오기도 있었고 그만큼 존재감을 부여하고 싶었나 보다. 뭐, 그만큼 어디서든 열심히 하고 있겠다는 뜻 아니겠나. 결론적으로 이제 4개 정도 더 남았나?



인생일대의 꿈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학교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학생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다. 나는 좀 다른 학교를 만들고 싶다. 그게 내 진짜 꿈이다. 아, 그리고 진짜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Interviewer / Editor squib

Contents Manager Lee Sunkyung

Photographer SIN-YOUNG KIM

Graphic Designer preriro

Director op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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